!WARNING! 이 블로그에는 게임만 보면 짖는 개가 살아요

2014년 10월 9일 목요일

[존나기니까 눈갱주의] 한국 게임이 걸어온, 걷고 있는, 걸어갈 길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게짖갭니다.

오늘은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대로, 욕 먹는 한국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포스팅 세 줄 요약>
1. '한국 게임의 사행성은 그런 게임에 돈을 쓴 게이머 탓'이라는 만화가 루리웹에 업로드
2. 만화를 보고 뿔난 게이머들의 비난성 댓글 폭주
3. 이걸 더 자세히 살펴보장!

몹시 긴 글이 될 거에요.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시작----------------------------

얼마 전,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름방학에 축구 게임인 피파 온라인 3에 빠져 열심히 했다고 하더군요.
게임에 돈을 잘 쓰지 않는 그 친구가, 그 게임에 8만원을 결제했다고 했습니다.

낮은 확률로 고급 선수의 카드가 나오는 '뽑기상자 패키지'를 샀고,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나오길 원했지만 결과는 물론 패망이었죠.

그리곤, 다시는 게임에 돈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게임을 지웠고요.

캐쉬템 지르다 파산한 간디.jpg
이러한 유료 아이템을 '랜덤박스'라고 합니다. 
뭐가 나올 지 모르는 거죠. 확률도 정확히 몇 %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일본같은 경우 사행성 뽑기 아이템에 대하여,
개발사가 유저들에게 그 확률을 고지하도록 법제화했습니다만,
한국에는 그런 법이 없거든요.

어쨌든 고급 아이템을 뽑기만 한다면, 게임은 훨씬 재밌어지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경로가 유료 아이템뿐이니, 말 그대로 '지르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경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요.


한국에서 출시한 대다수의 온라인 게임/ 모바일 게임에서
이러한 사행성 짙은 과금 시스템을 흔하게 발견할 수 있어요.

몇 년 전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돈만 쓰면 확실하게 남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거든요.
과금량이 적은 대다수 유저는 분통을 터뜨렸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돈을 쓰면 확률적으로 좋은 아이템을 얻는 과금 시스템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돈을 안 쓰는 유저에게는요.

왜 이런 유료 뽑기가 성행하게 되었을까요?
그 배경에는, 게임을 비롯한 콘텐츠에 대한 한국의 특수한 인식이 깔려 있어요.

'콘텐츠는 공짜여야만 한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신문 이야기를 해 볼까요.
아시다시피, 종이신문의 구독률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데 뭐 하러 돈을 내겠어요?

신문사들은 초기 인터넷에 기사를 공짜로 낸 것이 실수였음을 깨닫고,
뒤늦게 여러 유료화 모델을 마련하거나 먹고 살 길을 찾느라 분주한 상황입니다.
큰 신문사의 경우엔 방송 쪽으로 비중을 옮겨가려는 움직임도 보이죠.

 영화나 서적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토렌트나 P2P 공유 사이트에서 상당히 손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극장 스크린으로 보고 싶은 최신 영화가 아니라면 우선 검색부터 하고 봅니다.

만화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지만,
웹툰이라는 새로운 수익구조 덕분에 살아남았고
유명 작가들은 2차 판권 등으로 정당한 수익을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화는 아직까진 예외에 속해요.
대부분의 콘텐츠는 불법 유통에 시달리고 있어요.
클릭 몇 번에 영화값을 아낀다는 건 '개이득' 아니겠슴까.

이제 게임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온라인 게임이 한국을 휩쓸기 전,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고 설치만으로 즐기는
'PC 패키지 게임'이 게임 시장의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이죠.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JRPG(깊이있는 세계관/ 스토리/ 턴제를 특징으로 한 일본식 RPG)에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도 창세기전, 악튜러스 등 괜찮은 패키지 게임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소프트맥스, 손노리 등 굵직한 게임개발사가 대표작을 생산하며 성장하던,
한국 패키지 게임의 전성기라고 불리죠. RPG뿐 아니라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게임이 한국에서 개발되어 출시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어요.
아니, 세계 기준에서 보면 막 발걸음을 내딛던 시기였으니까
성장기와 전성기 사이의 어디쯤이었을 겁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와레즈'라는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가 불법 성인 콘텐츠를 등에 업고 성행했거든요.
사람들은 패키지 게임을 구매하지 않고 불법으로 다운받아 즐겼고,
개발사들은 재정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단순히 와레즈와 거기서 불법 다운로드를 한 게이머 탓만은 아니에요.
당시 한국 개발사가 내놓은 패키지 게임의 대부분은 
심각한 버그(게임 내 발생하는 오류)로 악명이 자자했으니까요.

돈 주고 샀는데 버그 때문에 엔딩을 못 봤다는 사람들이 속출했죠.
저도 그 중 하나였고요.

한국 게임을 하느니, 파이널 판타지나 드래곤 퀘스트, 파랜드 택틱스와 같은
일본의 RPG 게임을 와레즈에서 구해 플레이하는 유저가 늘어났습니다.

한국 게임 개발사들이 신용을 잃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도 전에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2가 한국에 상륙합니다.
한국 개발사가 세계 레벨에 도달하기도 전,
유저들은 숨가쁘게 '월드 클래스'의 맛을 봐 버렸고,
한국 게임사에 대한 불신은 그대로 남았죠.

전국에 PC방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NC소프트가 한국형 MMORPG의 시초 
'리니지'를 내놓으면서 패키지 게임 시장은 사장됩니다.

리니지가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대성공을 거두면서
한국 게임시장은 온라인 전국시대로 돌입하죠.

팔리지 않는 패키지를 버리고 너도나도 돈 되는 온라인으로 갈아탄 거죠.

우리는 우직하게 패키지 게임으로 승부를 보겠다!
진정한 게이머는 우리 게임의 게임성을 알아봐 줄 것이다!
라고 한 게임사는 망하거나 합병되었고, 
온라인으로 가야만 당장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넷마블에 합병된 손노리는 화이트데이 모바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는 유수의 MMORPG가 속속 등장합니다.
블리자드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로 이 전국시대를 끝장내 버리기 전까지 말이죠.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의 '정액제' 시스템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플레이 시간에 비례한 돈만 지불하고 게임을 했거든요.
그건 게임을 하기 위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돈이었고,
게임 안에서는 과금여부가 아무런 영향이 없었습니다.

돈을 쓴다고 더 강한 게 아니었다는 거죠.

하지만 이런 정액제는 곧 주류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게임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아이템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유료 아이템은 당연히 독보적인 성능을 발휘했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리니지를 기점으로, 게임 내 화폐를 현실의 화폐와 거래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집행검'이라는 아이템이 '집 한채 값'이라 집행검이다, 란 소리도 있었죠.

당연히 게임 회사들은 게임 밖에서 도는 돈을 게임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했습니다.

개인 간 이루어지는 '현질'을 아예 게임사와 유저 간에 이루어지게 만든 거죠.
그 결과가 바로 유료 아이템, 소위 '캐쉬템'입니다.

캐쉬템이 등장하면서 정액제는 점점 사라지고,
게임 플레이 자체는 무료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캐쉬템을 사야만 하는 
게임들이 대세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더 돈이 되었거든요.

돈이 많든 적든, 유저들은 한 달에 정해진 금액만을 지불했던 시절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한 달에 몇 십만원을 쓰도록 상한선을 풀어버리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 수준으로 게임을 즐기게 하는 것이
훨씬 돈이 되는 장사였으니까요. 게임의 밸런스가 무너지더라도요.

던전앤파이터를 기점으로 무료를 포방한 '부분유료제' 시스템이 대세로 정착,
게임사들은 전에 맛보지 못했던 돈맛을 보게 됩니다.

장비를 캐쉬로 구입하는 시스템은 이후,
좋은 아이템이 확률적으로 나오는 랜덤박스로 진화하게 되고요.
랜덤박스는 당연하게도 핵과금러의 도박욕을 자극하는 데 성공하게 되죠.

유저들의 '콘텐츠=공짜' 인식은 고착화되는 한편,
대다수 유저들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모순되게도, 당연한 결과였죠. 
조삼모사를 눈치챈 원숭이의 기분이라고 할까요?

패키지 시절 느꼈던 '버그 투성이'의 불신감에 더해,
이제는 사행성이 넘치는 게임을 만든다고 난리를 쳤죠.
개발사들은 개발사대로, 돈도 안 쓰면서 잔소리만 많은
게이머들을 점점 신경쓰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게임사를 먹여살리는 건 더 이상 그들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들이 아무리 욕을 하고 난리를 쳐도, 
유료 아이템을 몇 백, 몇 천만 단위로 구입해주는
헤비 유저만 잘 대접해주면 돈은 굴러들어왔으니까요.

던전앤파이터가 중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고착 상태에 빠집니다.

한국 게이머와 개발사 간의 보이지 않는 상호불신은
이렇게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됐어요.
이제 불신을 넘어 상호'무시'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죠.

당연한 소리지만, 한국 게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은
게임을 좋아하지만 돈은 안 쓰는 다수에서 
점차 게임에 돈을 쓰는 소수의 사람들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외쳐! 돈개 기리기리 돈개 기리기리!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기는 한국 게임사에게 돈도 되었지만 독이기도 했습니다.
한국 게임이 사행성과 돈에 치중한 개발과 운영에 골몰하는 동안,
정액제를 기반으로 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세계 시장을 석권했거든요.
지금은 다소 하향세입니다만, 당시의 한국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죠.

한국 게임사는 게임의 본질인 '재미'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물론 사행성 또한 '재미' 중 하나임에 분명하고 사행성은 상업성을 보장하지만 
지속 가능한 대중성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돈 없는 80과 돈 있는 20을 모두 아우르지 못하는 상태는
콘텐츠로서의 생명력을 스스로 깎아먹는 꼴이나 마찬가지죠.

게임 개발사들은 몹시 위태로운 성장기를 보냈고,
많은 돈을 버는 중에도 무엇이 '좋은 게임'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몇 번의 예외가 있긴 했어요.

'그라나도 에스파다'나 '마비노기'가 그런 예외사례로 회자됩니다.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참신한 전투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유료화와 운영 등 여러 문제로 시장에서 배척됐고,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문제점)
마비노기는 부분유료로 전환, 캐쉬템을 판매하며 살아남았지만
초창기 유저는 대부분 이탈한 상태로, '변질'되었단 비판을 받고 있죠.

한국이라는 작은 시장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서요.
게임 플레이 레벨은 세계 최고 수준인, 눈 높은 한국 게이머들을 상대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게임 개발사가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부분유료와 랜덤박스는 기업의 영리추구와
한국 게이머의 '게임=공짜'라는 인식이 낳은 기형아 쯤 되는 셈이겠죠.

그래서 지금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패키지와 콘솔게임이 충분히 시장에 자리잡을 시간조차 없었고,
그라나도 에스파다가 무너지며 게임사들은 '잘 만들어봤자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외산게임인 롤과 피파온라인3이 한국 온라인게임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했고,
한국 게이머들은 스팀을 위시한 외국 PC게임 플랫폼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금력 있는 게임사들은 'WoW 타도'를 외치며 백억 넘는 예산을 쏟아부어
MMORPG를 만들기도 했습니다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아성을 뛰어넘진 못했습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와우 시스템을 대부분 모방해서 내놓았기 때문이었죠.

그 상황에서 국내 개발사는 블리자드 수준의 참신함과 재미를 잡는
게임을 내놓을 여력이 안 됐습니다. 결코 게을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기형적인 성장과정 탓이 상당부분 작용했다고 봐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아이같은 느낌이라면, 적절한 설명이 될까요.

그렇다고 국산 MMORPG 모두가 망했단 소리는 아닙니다. 뛰어넘지 못했을 뿐이죠.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새롭고 재밌는 게임을 내놓을 만큼의 경험이 없었거든요.

여기서 절치부심해, 개발력을 끌어올려 와우를 뛰어넘는 게임이 나올 수도 있었겠죠.
낮은 가능성의, 결과론적인 얘기긴 합니다만.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모바일 플랫폼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게임사들에겐 당장 숨통이 트이는 일이었죠.

게임사들은 이제 '게임을 해 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게임은 많이 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요.

사행성 시스템이 가미된 모바일 게임은 신선했고,
비록 표절 논란에 휩싸이고 게임의 기본적 재미가 떨어지더라도
도박성과 사행성만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짧게, 틈틈이 즐길 수 있다는 특성으로
경제력 있는 직장인들이 게임 시장에 대거 편입되었고,
게임회사들은 다시 새로운 금맥을 찾아 오늘날과 같은 유혈 경쟁을 펼치고 있죠.

믿으실 수 없겠지만, 어떤 극소수의 사람들은
한 달에 몇 천만원을 쓰고, 간혹 억을 넘기는 금액을 쾌척하기도 합니다.

커뮤니티에서 소위 '과금땅크(탱크)', '핵과금러'로 칭송받는 사람들이죠.

핵과금러들의 격언.jpg
대다수의 무과금, 소과금 게이머들은 이런 사람들 덕분에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해도, 정말이지 과언은 아닌 셈이죠.

모바일 게임의 평균 수명은 3개월에서 6개월 가량.
단시간에 만들어, 단시간에 최대 수익을 뽑고, 
단물이 다 빠지면 서버를 내리고 서비스를 종료합니다.

벌어들인 돈으로 또 게임 몇 개를 뚝딱 만들어서,
다시 돈을 벌고 다른 걸 만듭니다. 공장처럼요.


이런 상황에서 '캔디 크러시 사가' 표절 논란에도 불구하고
애니팡이 대박 신화를 일으키고, 애니팡2가 또 성공을 거두면서
참신함이나 창의성 같은 요소는 게임사 측에서 평가절하되고,
기존 게이머와 게임사의 간극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벌어졌습니다.



사행성 레이스가 가속화된 또 다른 이유는
모바일 게임의 경우 카카오톡과 같은 모바일 메신저,
구글플레이 등의 앱 마켓과 같은 유통사가 흥행에 결정적 요소가 되고,
따라서 게임의 수익 대부분을 가져가기 때문이에요.

카톡 게임을 많은 사람들이 욕하지만
그래도 게임사가 카톡게임으로 내놓는 이유는
카톡에게 돈을 뺏겨도 안하는 것보단 돈이 되기 때문이고요.

게임을 오래 즐겨온 한국 게이머들은,
모바일 게임을 잘 하지 않아요.
더 재미있는 게임들을 즐겨왔기 때문입니다.

하더라도, 돈은 쓰지 않습니다.
차라리 스팀에 쓰죠.
콘솔로 눈을 돌리거나요.

우리나라 게임사에 한해서는, 게이머=소비자가 아니게 되어버린 이유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나는 게임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한다'라는 사람들조차
과거에는 복돌이(불법 다운로더) 시절을 대부분 보낸 경우가 많고,
지금은 한국 게임사를 돈만 밝힌다며 삿대질을 하는 상황입니다.

게임사의 잘못도 분명히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근시안적이고 '당장 간편한' 방법에 안주했으니까요.
이것이 세계 게임시장과 점점 괴리되는 결과를 초래했고요.

다만 당시 해외 유수 개발사와 동등한 수준의 게임을 개발해서
내놓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리스크가 있었고,
지금처럼 애초에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게임을 만드는 것이
보편화된 시절도 아니었죠.

많은 사람들이 '이제 한국 게임시장은 끝났다'고 말합니다.
'노답', '극혐'이라고도 하죠.

해외에서 성공한 온라인 게임을 가져와도,
'돈 되는' 운영방식이 어김없이 적용되어 그 빛이 바래고,
오히려 한국에서 만든 PC기반 온라인 게임을
해외에 수출해서 '정상적'인 운영으로 수익을 거두는 사례가 늘었죠.

이제 제 의견이랄까, 입장을 말씀드려 볼게요.

저는 우리나라 게임시장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게임으로 밥 벌어먹으려고 마음먹은 놈치고 불순한 생각일 수도 있죠.
하지만 사실이에요.

매출 지표상으로는 멀쩡해 보일 수 있어도, 결코 바람직한 상태라 할 수는 없습니다.

여성가족부는 변함없이 게임 때리기에 여념이 없지만,
지금의 사행성 천국에서는 사실 여성부의 게임규제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말하기도 뭐한 상황이 됐습니다.

다만 제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히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후,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어져버릴 때.

밑바닥의 유일한 장점은 앞으로 뭘 하든 올라가게 된다는 점! 주륵...
그러니까 지금 게임회사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돈 많은 사람들이,
지금 대충 내놓는 사행성 짙은 게임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될 때.

제가 기다리는 건 그런 상황이에요.

게임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소수자'로서 인식됩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은 nerd or geek, '찌질이'라 불리죠.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만.

지금 한국 시장은 매우 과격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다수의 게이머가 게임을 재미로 판단할 수 있는,
게임이 더 이상 찌질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잡는,
성숙한 게임 시장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라고요.

콘텐츠에 대하여 정당한 경제적 보상을 자발적으로 지불하는 시스템을 만든다.


비단 게임에서만 골몰하는 이슈가 아닙니다. 
신문, 방송, 영화, 음악, 만화, 애니메이션... 

몇몇 분야는 이미 그러한 시스템을 확립했고,
몇몇 분야는 만들어나가는 단계에 있습니다.

경제적 보상만이 문제라면 사행성 시스템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만,
이는 경제력이 월등하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의 지갑을 열 수 없습니다.
행여나 억지로 열게 만들어도, 
'다신 돈을 쓰지 않겠다'는 제 친구같은 사람들만 잔뜩 늘어날 뿐이죠.

저 위의 빨간 글씨는 사실 굉장한 이상론으로,
100% 달성되기는 힘들고, 충분히 구현되기에도
앞으로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거에요.

그 중간과정이 한없이 힘들기만 할 것이냐, 
게임의 경우 그렇지만은 않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네트워크 효과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습니다.
상품에 대한 타인의 수요가 어떤 한 사람의 수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많이 쓰면 쓸수록 상품의 효용가치가 증가하는 것이죠.

워드 프로세서를 예로 들어볼까요.
많은 사람들이 워드를 사용하면 할 수록, *.doc, *.docx와 같은
파일 포맷을 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게 됩니다.
워드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제가 왜 이걸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개념은 '죽어도 돈을 쓰지 않는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때문이에요.
불법 다운로더가 이 부류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겠죠.

네트워크 효과에 따르면, 불법 다운로더도 상품의 사용자에 포함됩니다.
실질적인 구매를 하지 않았지만, 상품의 네트워크를 키우는 데 일조하니까요.
이 네트워크가 커지면 커질수록, '돈을 낼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해당 상품의 네트워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임승차자를 옹호하는 이론은 아닙니다.
다만 일단의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 효과가 부분유료 체제의 온라인 게임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죠.

부분유료 온라인 게임에 있어서 
'돈을 아예 안 쓰거나 적게 쓰는 사람' = 무임승차자,
'돈을 적당히 혹은 많이 쓰는 사람' = 유임승차자
라고 해 볼게요.

두 부류는 모두 게임 인기도의 지표인 동시접속자 수에 포함되고요.

무임승차자는 실질적인 경제적 보상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네트워크 밖의 유임승차자가 해당 네트워크에 들어올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남들이 다 하는 것, 다 재밌다고 하는 것을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으니까요. 

무임승차자 게이머들을 무조건 배척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네트워크의 80%를 형성하는 자원이니까요.
설령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요.

그럼 지금은 어째서 문제일까요,

현재 한국 게임의 문제는 바로 이 80%의 무임승차자들이
95% 수준까지 올라가 버렸다는 것, 
그리고
95%가 구성하는 네트워크가 5%의 유임승차자를 유도하는 것이 아닌
5%가 95%와 상관없이 판을 좌지우지하는 것입니다.

기업들은 5%의 의지에 따라 춤을 추는 개가 될 수밖에 없죠.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1. 95%의 무임승차자 비율이 하락하고 5%의 유임승차자 비율이 상승하는 것.
예를 들면, 50%의 무과금, 35%의 소과금, 10%의 중과금, 5%의 핵과금.

2. 무과금+중소과금 게이머의 결제총액이 핵과금 게이머의 결제총액을 
상회하거나 최소한 동등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

게임사가 핵과금 유저와 함께 무과금/ 중소과금 유저를 포용하려는 노력과 함께, 
소비자로서 저작권과 콘텐츠에 대한 게이머들의 인식이 점차 나아짐에 따라
이 두 가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부분유료에 랜덤박스(혹은 가챠) 시스템은 적어도 당분간은 계속 유지될 겁니다.
사행성도 재미인걸요.

하지만 사행성 일변도가 아니라 사행성에 다른 재미까지
복합적으로 잘 섞어낸 게임이 더 많은 돈을 벌겠죠.

사행성과 다른 재미가 병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80의 무임승차자와 20의 유임승차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운영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운영은 이미 일본의 모바일 게임에서 계속 실험되고 있어요.
요즘 지켜보고 있는 게임은 '체인 크로니클'이라는 일본산 모바일 RPG입니다.

[체인 크로니클 메인 기획자 마츠나가 준 인터뷰]

사행성 가챠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과금 유저'와 '무과금 유저' 간
넘사벽은 계속적으로 비판받고 있습니다만,

직업 간 치우친 밸런스 문제를 지속적으로 수정하면서,
특정 5성 고급 캐릭터를 게임 내 화폐로 구매할 수 있게 하고
무과금 플레이어도 스토리 진행 등 메인 콘텐츠 소비에 무리가 없도록
일정 수준의 유료 아이템을 이벤트로 제공하는 등, 다양한 유저군을 잔존시키며
장수 게임으로 자리잡아 일본에서는 현재 2부가 나온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체인크로니클 유저들 중에는 일본어를 배워가면서
일본의 체인크로니클을 즐기는 사람도 최근 늘어나고 있어요.



제가 주요하게 보는 부분은 즉,
과금 유저와 무과금 유저를 포용해 나가는 작업들이고,
이는 곧 둘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과금을 하는 사람들은 과금하지 않는 사람들이 느끼는 재미를 알게 되고,
과금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금을 하는 재미를 알게 되죠.

유임승차자들이 사행성만 게임의 재미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고, 조금씩 다른 게임에 눈을 돌리게 될 겁니다.

유임승차자가 콘텐츠 가치수준을 평가하는 능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보다 가치있는 게임에 돈을 쓰게 될 것이고요.

여전히 사행성만을 좇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생겨나면,
다양한 게임에 자원(돈)이 배분되고,
사행성이 짙지 않은 게임도 돈을 벌게 됩니다.

그러면 사행성 아닌 게임을 무임승차자들이 즐기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네트워크 효과를 창출하고,
사행성에 골몰하던 유임 승차자를 그 네트워크로 흡수합니다.

게임 생산의 저변이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것이죠.
지금 스팀에서 인디 게임이 팔리는 것처럼요.

인디게임의 로망과 희망, 외쳐 스팀갓!
위에서 살펴봤듯, 모든 책임이 소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칼자루를 쥔 것은 소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임사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돈을 벌면서,
정부와 협력해 게이머를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인식을 바꾸는 것이죠.

천천히요.

아주 천천히.


이제 마무리할게요.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퇴근길에 아빠가 디아블로2 패키지를 사들고 집에 왔을 때.

반질반질한 상자를 몇 번이고 만지고,

그 촉감을 기억하고,

상자 안에 든 설명서를 빠짐없이 읽고,

그 두근거림을 기억하고,

또 읽고 계속해서 읽고 나서야,

부푼 마음으로 컴퓨터에 CD를 넣어서 설치하고,

설치가 언제 끝나나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게임을 처음으로 돌렸을 때의 기쁨들,

그런 어린 시절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창세기전이나 악튜러스가

가판대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고,

동네 작은 게임가게에 상자가 아닌

볼품없는 CD 쥬얼 케이스에 담겨서

염가에 팔리는 걸 본 순간도 기억하고 있어요.


추억팔이해서 미안하지만,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아마 비슷할 거라 생각합니다.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현질로 가득한 게임을 만들고 싶어하는 개발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

게임 개발자도 한때 키보드에 콧물 흘리던 게이머였으니까요.


게임이라는 콘텐츠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나이를 먹었죠. 저도 나이를 조금 먹었습니다.

이제 얼마쯤 지나면 저는 취직을 할 거고,

사람들이 욕하는 게임을 당분간 만들게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언젠간... 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좋아해주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요.

제 고집, 제 취향으로만 만든 게임이 아니라요.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적어도 분유값을 벌어야 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여자들도 많이 게임을 즐기길 바라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요.

최근 e스포츠에서 여성 팬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 좋은 조짐이죠.

언젠간 여자들이 영화 만드는 남자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게임 만드는 남자도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랍니다.


그래야 나같은 놈도 겨... 결혼이란 것을... 할 것 아닌가...!!!!


아... ㅅㅂ 눙물 of 쓰나미...

눙물과 함께 오늘의 포스팅을 마침ㄴ디ㅏ

긴 글 읽느라 수고하셧습니닼ㅋ

댓글 4개:

  1. 게이머의 진심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제점수는요
    A+

    답글삭제
  2.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핵과금의 절대소수와 무과금의 절대다수 사이에서 기업이 핵과금의 장단에 맞추다보니 무과금은 다 떨어져나가고 ㅠㅠㅜ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글이네요

    답글삭제
    답글
    1. 한편으론 계속 회의감도 듭니다. 결국 이 문제는 경제양극화와도 밀접한 문제인데, 상위20%와 하위80%의 경제수준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구체적인 데이터를 인용한 것도 아니고, 제 주관이 많이 반영된 글이라 아 이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주셧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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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핑크 가라사대

스무 살에 이걸 하고 다음에는 저걸 하고, 하는 식의 계획은 내가 볼 때 완전히 난센스다. 완벽한 쓰레기다. 그대로 될 리가 없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서 절대 예상할 수 없다. 대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라. 그래서 멋진 실수를 해라. 실수는 자산이다. 대신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멋진 실수를 통해 배워라.